어제의 일기
'어제'
코로나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의 일환으로, 10시까지 출근하는 날이었다.
8시쯤 눈을 떴는데, 왼쪽 허벅지가 굉장히 뻐근했다.
목이나 등허리에 담 걸린 적은 많았지만, 허벅지 쪽 담은 처음이었다.
바로 일어나기를 포기하고, 한참을 뒤척이고 나서야 끙끙대면서 일어났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니까 좀 풀리는 기분도 들었다.
그 전날은 소주 반 병 밖에 안 먹었는데, 술 때문은 아닌 것 같고.
언제나 그랬듯이 운동부족이겠거니 하고, 대충 스트레칭 좀 하다가 출근했다.
거의 10시가 다 되어서 사무실에 도착했다. 창 밖엔 미세먼지가 심했다.
오늘따라 한층 더 어수선했다. 이제 실근무일이 5일 남았음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점심은 동기 2명과 돈가스를 먹었다. 이 동네 제일 핫플인데, 웨이팅이 한 명도 없었다. 운이 좋았다.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까지 사 먹었는데, 사무실로 돌아가니 자리마다 아이스 카페라테 한 잔씩이 있었다.
어느 분께서 감사의 의미로 직원들에게 한 잔씩 돌리신 것이었다. 하루에 커피 두 잔은 과하지 않았다.
또 잠시 후에 어느 분께서 감사의 의미로 피자, 치킨을 사 오셨다. 배가 불렀지만, 기쁘게 집어먹었다.
커피에 치킨, 피자라니. 흔치 않은 날이었다. 미세먼지도 옅어지고 있었다.
오후에도 여전히 허벅지 쪽은 당겼다.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열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최근 사무실마다 배부된 체온계로 몇 차례 측정했지만 37도를 넘지 않았다. 열기운은 기분 탓인 듯했다.
19시 퇴근 후 친구 2명을 만났다.
지난주에 오늘 날짜에 만나기로 정해놨는데, 퇴근 시간이 제일 늦은 내 쪽으로 와준 것이었다.
19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만나서, 24시가 다 되어서 헤어졌다.
술은 많이 먹지 않았다. 3명이서 소주 3병 정도 마셨다.
그 전날에도 한 잔 했고, 내일도 한 잔 하기로 했기 때문에 달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5시간 동안 소주 1병이면 매우 모범적인 음주였다.
시내버스는 막차가 끊겼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왔다.
오후보다 허벅지 쪽이 좀 더 당겼다.
열심히 뒤뚱거리며 걸었다. 뒤뚱거리다가 힘들면 잠시 멈춰서 숨을 고르고 다시 걸었다.
자정이 넘은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도로엔 택시만 보였다.
집에 와서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고, 허벅지 좀 풀어지라는 생각으로 보일러를 뜨겁게 돌려놓고, 바로 잤다.
사실 여기까지 서론이었다.
새벽에 눈이 떠졌다. 휴대폰 시계는 3시 10분이었다.
가끔 보일러를 너무 뜨겁게 돌려놓고 자면 그 열기에 눈이 떠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별 일 아니었다.
보일러만 줄이고 다시 자야지.
허벅지 쪽은 여전히 뻐근했다. 끙끙대면서 여기저기 짚고 일어났다.
일어나서 방 전등을 켰는데, 앞이 보이지 않았다.
보일러 온도조절기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방바닥에 있는 가습기를 발로 차고 넘어졌다.
바닥에 있는 안경을 주어서 썼는데, 초점이 맞질 않았다.
휴대폰을 들여다보았지만, 글도 그림도 읽을 수 없었다.
또 잠깐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시 넘어졌던 것 같았다. 방은 밝아져 있었다.
언제 넘어졌는지, 언제 일어섰는지, 언제 보일러 온도조절기를 만졌는지, 뒤죽박죽이었다.
너무 더웠다.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더듬어보니 얼굴 전체가 땀범벅이었다. 세수한 것처럼 땀이 흐르고 있었다.
허벅지 통증은 느낄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
고막이 마구 울리고 있었다. 세상 모든 소리가 들리는 느낌이 들다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기를 반복했다.
점점 시야가 어두워지고, 시야가 좁아지고, 초점이 흐려지고 있었다.
거실로 나가서 불을 켰다. 주방 불도 켜고, 화장실 불도 켰다.
불현듯 드는 생각은, 코로나에 걸린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다.
오늘 낮에 본 기사가 떠올랐다. 17세 소년이 발열 증상 이후로 미처 손 쓸 새도 없이 명을 달리했다고 했다.
식은땀이 식기를 바라면서, 최대한 심호흡을 하고, 되는 대로 아무거나 잡고 섰다.
조금씩 시야가 밝아졌다.
고막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대는 소리였다.
응급실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휴대폰으로 검색을 했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종합병원이 있다.
또 쓰러질 것 같은 느낌이 몰려오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쓰러질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룸메이트 형이 자고 있을 방 문을 몇 번 두드렸다. 나름 세게 두드렸는데, 계속 주먹이 엇나갔다.
방에서 뒤척이는 소리는 들렸지만, 깨우진 못한 것 같았다.
술을 당분간 끊어야겠다. 내일도 술 약속이 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술을 또 마시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렇게 한참을, 온갖 걱정과 상상을 하면서 서 있었다.
땀이 식으면서 열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제야 허벅지 통증이 느껴졌다.
시간이 한참 흘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겨우 3시 30분이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몰랐다. 허벅지 통증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됐나. 스트레스 때문인가. 소주 때문인가.
열이 떨어지는 걸로 볼 때 코로나에 걸린 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이불속에 누울 용기는 없었다. 책상에 앉아서 노트북으로 시답잖은 기사와 블로그 같은 걸 들여다보았다.
코로나, 폐렴, 패혈증, 사이토카인 폭풍. 근막통증증후군, 담음, 디스크. 코스피, 삼성전자, 셰일, 스와프, 개미.
그러다가 동이 틀 때쯤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방이 밝아졌음에 안심이 됐다.
내일(오늘)은 어차피 휴가였다.
자고 일어나면 하루 종일 아무 것도 안 해야 겠다고 다짐했다.